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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1일(일요일)

치유의 문학 수필이 있는 이야기

모과를 닮고 싶다
<隨筆> 임미리
2021. 11.20(토) 20:42확대축소
작가 임미리


선정암 뜨락 모과가 익어간다. 노랗게 옷매무새를 고치고 세상 청순한 얼굴로 유혹의 추파를 던진다. 길손의 눈길을 훅 잡아채는 모과.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는데 이쯤 되면 그것도 거짓인 것 같다. 울퉁불퉁한 생김새의 투박한 모양은 그 무엇에도 견줄 수가 없지만 노랗게 익어가는 이쁜 빛깔에는 누구나 현혹된다.

가을엔 누가 뭐래도 노랑이다. 그 대열에 낀 모과가 수줍음도 잊은 채 어느 집 담장을 넘어와 손짓하고 있는 것을 볼 때면 진정한 가을이 온 것이다. 모과는 만져보기도 전에 눈에 들어오는 순간 온몸에 향기가 스며드는 착각을 일으킨다. 그 모과를 코끝에 가까이 가져가면 마음은 더없이 평화로워진다.

모과가 꽃을 피울 때쯤이면 봄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를 잡을 때다. 더 이상 봄에 대한 설레임도 없어지고 그리움에 오매불망하는 마음이 사그라지는 그때서야 모과는 살며시 이파리를 피우고 꽃을 한 송이씩 피워낸다. 수피가 아름다운 나무에서 연분홍 꽃이 올라오면 봄은 그렇게 소리 없이 무너진다.

모과를 생각하면 온몸이 향기로워진다. 울퉁불퉁하고 투박한 생김새와 다르게 향기는 그 무엇에도 견줄 수가 없다. 향기를 맡고 있으면 모과 꽃의 연분홍 꽃잎이 휘날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단단한 모과와 다르게 꽃잎은 한없이 부드럽고 앙증맞다. 모과의 꽃말은 유혹이다. 아마도 이 꽃말은 모과의 향기 때문은 아닐까.

꽃이 지고 잊은 듯 무더운 여름이 가고, 나무에 열매가 맺혔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가을이 온다. 그때쯤 잎사귀에 가려 동색이라 보이지 않던 모과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나무에 매달려 있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초록색이던 모과는 점점 실체를 노랗게 드러내 유혹의 추파를 던지기 시작한다. 모과의 얼굴은 매끈하다. 굳이 표현하자면 생경하다. 아무하고도 눈을 맞추지 않겠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모과를 보는 순간 우리는 첫눈에 빠져들고 만다.

모과의 숨결은 노랗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서서히 변하는 모과를 보고 있으면 희망과 행복이 샘솟는 듯하여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모과가 어서 빨리 익기를 바라면서 나지도 않는 향기를 코가 기억하는지 코끝이 저절로 향기로워지고 세파에 지친 숨결이 편안해진다.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를 보고 있으면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라는 그림이 생각난다. 노랑 문양에 둘러싸인 연인. 구별되지 않는 결합체가 하나인 듯 둘인 연인. 여인의 구부러진 발가락, 그 사이로 모과 향이 흔적도 없이 빠져나가 버리는 것은 아닌지 혼자서 안달이 난다.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그림처럼 모과의 향기는 사람을 끌어들인다.



모과의 맛은 미묘하다. 감미롭게 익은 모과를 썰어 차를 담으면 모과의 숨결이 보인다. 유리병 안에서 숨을 쉴 때면 보는 이의 기분이 저절로 좋아진다. 적당히 때를 기다리면 서서히 발효가 된다. 그 발효된 모과차를 따뜻하게 만들어 유리잔에 넣어 음미하고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어진다. 시큼하고 떨떠름한 그 미묘한 맛을 무엇에 견주어 말하리.

모과는 썩어도 썩지 않는다. 지난 가을 지인이 준 모과 한 알이 일년이 지나도록 내 차 안에 있다. 그 모과의 향기를 기억하고 있기에 모과 한 알을 건넨 지인의 마음을 알고 있기에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간직하고 있다. 서서히 모과의 몸이 줄어들고 있다. 처음에는 노랗던 모과의 몸피가 이제는 갈색이 되어 버렸다.

모과는 썩어도 냄새가 나지 않는다. 모든 과일은 썩으면 진물이 흐르고 날파리가 생기고 냄새가 난다. 모과는 진물이 흐르지도 않고, 날파리도 생기지 않으며 냄새도 나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작아지고 말라간다. 돌처럼 단단히 굳어간다. 달짝지근한 향기를 온몸에 고이 간직한 채로 그렇게.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듯이 시꺼먼 돌덩이 화석이 되어간다.

어느 작가가 모과 한 알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남자의 흉상에 비유했을 때는 가슴에 와 닿지 않았었다. 그런데 색깔이 변해도 차마 버리지 못했던 지난해 내게로 온 모과를 보면서 자코메티의 마지막 작품 ‘앉아 있는 남자의 흉상’에 동감하게 되었다. 그 작가의 묘사처럼 고행승의 열반을 보는 듯 하다는 말에도 공감하며 온몸에 전율을 느낀다.

모과를 닮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모과처럼 익어가고 싶다. 주름살 가득 차올라 늙어가도 향기로워지고 싶다. 냄새도 없이 모과처럼 단단해지고 싶다. 모과처럼 향기만을 간직한 채로 향기롭게 생을 마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모든 것과 결별을 하고 더 이상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천년이 지나도 그대로인 화석이 되고 싶다.

속세를 등지고 선정암 뜨락에 들어앉아 유혹하는 모과에 휘둘렸다. 산새들의 지저귐을 노래 삼아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소리를 친구 삼아 노랗게 익어가는 모과. 가을 암자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길 모과의 숨결이 향기롭다. 더불어 익어가는 모과와 함께라면 속세의 소소한 일상도 향기로워질 것이다.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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