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염정이 들려주는 노래

<선인의 향기를 찾아> -소설가 이진의 화순 누정 기행<1>
2019. 04.09(화) 15:26확대축소
소설가 이 진


4월의 첫 날, 물염정을 찾았다. 언덕 위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정자를 맹렬한 꽃샘바람이 휘감아 돈다. 그 때문인가? 잔뜩 웅크린 물결과 하얗게 질린 절벽이 왠지 차갑고 메말라 보였다. 그렇다고 봄이 쫓겨 갈까? 강물엔 버들가지 새순이 연하디 연한 초록을 드리우고, 가파르게 솟은 절벽 어디쯤에선 연분홍 진달래가 살포시 고갤 내밀고 있다.

물염정은 ‘화순 적벽(전라남도기념물 제60호)’ 상류의 물염적벽을 조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진 정자로, 조선 중기의 문신 송정순이 건립하였다. 그의 호를 따서 물염정(勿染亭)이라 했는데 ‘물염’이란 ‘속세에 물들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자 안쪽에는 택당 이식, 하서 김인후, 석주 권필 등 당대 뛰어난 문필가의 글이 새겨진 현판들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호남 학맥의 거두 최산두 선생이 후학을 양성하던 장소였다는 내력도 보는 이를 숙연케 한다.

하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따로 있었다. 옹이가 지고 울퉁불퉁한 원래 형태 그대로의 재질을 살린 기둥 하나, 시류에 결코 휩쓸리지 않으려는 조선 선비의 청백한 기상이 물씬 풍겨나는 듯 했다. 물론 최초 건립 당시의 기둥은 아니다.

1981년 중수하면서 아랫마을 사람들이 몹시 아끼던 배롱나무를 베어다 세운 것이라고 하니 말이다. 물염정을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이, 거기에 물염정을 세우고 보존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았던 선인들의 정신과 맞닿아 내뿜는 향기가 진하다.



그래선가? 물염정에 앉아, 아마는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물염적벽을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그 청정함이 속세에 찌든 심신을 깨끗이 씻어내 주는 듯 싶다. 어쩌면 거기 내걸린 시인묵객들의 시가 안겨주는 위로가 더해져서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낙엽 모아 붉은 밤을 익히고 /童收落葉燒紅栗
아내는 국화 따다 흰 술에 띄우누나 /妻摘黃花泛白? (나무송, 勿染亭原韻 일부)

송정순으로부터 물염정을 넘겨받은 외손자 나무송이 지었다는 시 한 구절, 아름답고 평화로운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면서 가을에 와야 했나 싶어진다. 하지만 이 시에 차운하여 지었다는 매천 황현의 시 구절은 물염정을 마주하는데 계절이 따로 있지 않다고 속삭인다.

해 저물녘 강변 따라 머나먼 길 잊고 가오 /落日江汀忘路遠
푸른 강가 구름 위로 우뚝 솟은 정자 하나 /滄洲亭子拂雲高 (황현, 敬次勿染亭韻 일부)

강변 풍경에 취해 먼 길도 잊고 하염없이 걷던 방랑객을 우연인 듯 맞아들이는 정자 하나, 누군들 거기에서 위로와 평안을 얻지 않으랴! 그래서일 것이다. 평생을 떠돌던 방랑시인 김병연(김삿갓)이 물염정을 찾아 수많은 시를 남겼고, 말년에는 아예 이곳에 눌러 살다 여기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시비와 그의 모습을 형상화한 조각품이 정자 아래 서 있다. 방랑시인 김삿갓의 노래가 아득히 들려온다.

나는 사랑한다오, 푸른 산빛이 물에 어리는 걸/ 吾愛靑山倒水來(김병연, 無題 마지막 련)

그에게 죽 한 그릇밖에 대접할 수 없음을 미안해하는 가난한 농부에게 고맙다는 말 대신 읊어 주었다는 시의 한 구절이다. 다시 찾아온 봄, 물염정에서 만난 방랑시인의 노래가 가슴을 촉촉이 적셔준다.

-작가 프로필-
이진: 소설가, 문학박사
前 목포대 외래교수, 광주여대 교수,
現 솔내음 문학연구소 소장
저서:<창>,<알레그로 마에스토소>,<꽁지를 위한 방법서설>,<하늘꽃 한송이, 너는>등


화순일보 mire5375@hanmail.net
이 기사는 화순일보 홈페이지(http://www.hwasun1.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mire537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