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저기 울창한 송림, 서강의 두 물줄기 사이에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가 눈앞에 들어온다. 광주에서 새벽에 출발하여 여섯 시간을 달려 도착한 강원도 영월 땅, 외로운 넋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밤잠을 설쳤다. 이제 눈앞에 있는 배만 타고 들어가면 된다.

그런데 조급한 마음과 달리 발걸음은 뒷걸음질치고 푸른 물결은 서슬 퍼런 수양대군의 모습 같다. 불과 몇 미터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청령포는 어린 임금의 한이 서려 꿈틀꿈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같이 작은 쪽배에 몸을 싣고 단종을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니 벌써 도착이다. 배에서 내리니 외로운 넋을 위로하려는 것인지 작고 예쁜 돌들이 강가를 수놓고 있고,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되었다는 울창한 송림에선 솔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한쪽은 깎아 세운 듯한 절벽이다.

오갈 때 없는 소년에게 이곳이 답답한 감옥처럼, 수양대군의 비수처럼 날카롭게 어린 마음을 찔러 많이 외롭고 무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송림으로 들어서니 시중을 들었던 궁녀들이 머물렀다는 작은 초가와 복원된 어소, 그리고 비각이 있다. 그 앞에는 비각을 향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인 소나무가 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소나무들은 비각을 향하고 있는데, 그것은 죽은 충신들의 혼령이 임금에 대한 예를 갖추기 위해 소나무가 되어 이곳에서 단군의 억울한 혼령을 위로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궁궐에서 폐위되어 심산계곡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의 어린 임금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줄 안다. 두 손 모아 단종의 넋을 위해 짧은 기도를 해보지만, 한양의 소식을 부질없이 기다렸을 어린 마음에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비각 앞에서 조금만 걸어 나오면 백성들의 출입을 금한다는 성역의 표시인 금표비가 있고, 바로 옆에는 말로만 듣던 육백 여년 정도 된 관음송이 있다. 나무에 앉아서 이 생각 저 생각에 젖어들었을 단종의 모습을 연상하며, 폐위된 어린 소년의 마음을 들은 소나무라 하여 ‘관음송(觀音松)’이라 부르는 나무를 본다.

나무의 줄기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어 하나는 한양을 향해 있고, 하나는 울창한 하늘을 향해 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소나무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눈 속으로 파고든다. 하늘은 그 시절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저려온다. 많은 인내와 고통으로 힘들고 외로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위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부인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하나하나 쌓았다는 망향탑이 있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 시름을 달래며 보냈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노산대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은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 자리를 내어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잠시 앉아 있다가 다시 노산군으로 강등되는 치욕을 당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뇌리를 스치자 그런 그의 모습이 어느새 여린 내 가슴에 베여 들어 짠물에 절인 듯 아프다. 여름철 우기엔 홍수가 범람하여 이곳 청령포가 물에 잠겼을 때 얼마나 두려웠을까?

물만 보면 두려움이 앞서는 내 자신을 생각해본다. 영월 관아의 객사인 광풍헌으로 처소를 옮길 때까지 강물을 바라보며 한양을 생각하고, 돌탑을 쌓으며 그의 아내인 정순왕후를 간절히 그리워했을 마음을 그려본다.

관음송 아래 홀로 앉아서 슬피 울며 하늘을 날 수 있는 한 마리 새를 꿈꾸고, 눈앞에 흐르는 서강을 바라보며 한척의 돛단배가 되는 꿈을 꾸었을지도 모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을 그에게 서강의 출렁이는 물소리마저 절망을 재촉하는 소리로 들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소년이 한 많은 짧은 생을 마감한 지 어느덧 오백오십 여년이 흘렀다. 권력을 얻기 위해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올라 수많은 치적을 남긴 수양대군도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었고, 어린 임금의 불행한 생도 역사의 한 페이지이라는 걸 영월에 오면 알 수 있다.

지금에야 단종은 영월 땅에서 복위 되어 영월에서 영원히 살아있는 왕으로 추대 받고 있다. 또한 그를 그리워하는 이들이 있기에 청령포를 찾는 이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십칠 세의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짐을 지고 한 많은 세상을 등진 한 소년의 마음 한 자락을 헤아리며, 영월 땅 서강을 떠나기 위해 배에서 내린다.

억겁의 세월이 흘러도 단종은 영월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을 믿는다. 고요히 흐르는 서강은 이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청령포를 나오니 주차장에 “욕심을 버리는 집”이란 글귀가 보인다. 주차장에 웬 찻집 하고 가까이 가니 화장실을 가리키는 이름이다. 사는 동안 많은 욕심을 안고 나 여기까지 왔는데, 청령포의 주인은 욕심을 버리고 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 隨筆약력 -
․ 화순초등학교 60회
․ 2008년「현대수필」 등단
․ 2008년「열린시학」 등단
․ 저서 시집『물고기자리』,『엄마의 재봉틀』
․ 광주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수료
․ 현 전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강사
․ 현대수필문인회원
․ 한국작가회원
․ 동천문학상, 열린시학상 수상

화순일보 mire5375@hanmail.net